본문 바로가기

영화를 논하다

그래비티(Gravity)에 관한 프로이트적 영화분석 (리뷰)



   설명서에 관한 설명문


   본 설명서는 초급자용으로 제작되었다. 대상 청자는 정신분석학과 영화학에 관한 지식이 소박하거나 전혀 없는 사람, 다차원영화 그래비티를 구매하고 멀미만 수령한 사람, 몸은 재밌게 느꼈지만 머리는 왜 재밌었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 사람들에 한정한다. 이런 청자들과 함께 프로이트에 주파수를 맞추고 중력gravity과 교신하는 것, 이를 통해 미지급된 재미를 돌려받는 것, 최종적으로 앞으로 프로이트적 심리치료 내러티브로 구성된 여러 작품을 만났을 때 당황하시지 아이하란 것이 설명서 너머 화자가 가진 바람이다.


   그래비티가 순전히 프로이트적으로만 구성된 건 아니나, 이런 서사구조를 무시한다면 영화를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즉 영화의 플롯과 메타포의 상당 부분이 프로이트적 심리치료 내러티브에 따라 제작되었다. 안타깝게도 국내 여러 지면은 영화의 물리학적, 특수효과적, 육체미적 해석들로만(다시 말해, 인상비평들로만) 가득하다. 기자들 사이에 "묵히면 똥 된다."라는 격언이 있듯이, 영화의 이미지가 미학적 폐허로 접어들기 이전에 더 본질적인 분석으로 그 진가를 붙잡아두고 싶다. 즉 흘러가게 내버려두지 않으려는, 반작용하려는 시도다.



    사용법: 프로이트의 삼차원 안경


장소 

물리법칙 

프로이트 

지표면 

중력 

의식 

대기권/수중 

양력/부력 

전의식 

우주 

무중력 

무의식 


   허블우주망원경에 새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임무를 수행하고자 라이언 스톤(산드라 블록)과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 분) 등은 우주왕복선 익스플로러호를 타고 지상으로부터 600km 상공인 우주공간에 머문다. 라이언이 통신장비 수리에 매달리는 사이, 러시아에서 폭파한 인공위성 잔해들이 우주 폭풍이 되어 익스플로러호에 몰아닥친다. 맷 코왈스키의 조력으로 최후의 생존자가 된 라이언은 소유즈에 탑승해 지구로의 생환을 시도하고 마침내 성공한다. 이것이 그래비티의 표면적인 줄거리다. 이렇게만 보자면 타이타닉의 우주왕복선 버전이 아닌강Aningaaq 싶다. 서둘러 프로이트의 초창기 도식을 불러온다면, 다행히 재구성의 암구호를 찾을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의식을 수면 위로 노출된 빙산의 일각으로 보았다. 수면 아래 감춰진 거대한 몸통은 무의식이라 명명했다. 파고에 따라 들랑거리는 중간지대를 전의식이라 불렀다. 이제 우리 뇌 속 3D 프린터에 전원을 공급하고 2차원 단면도를 3차원 입체모형으로 출력해보자. 중력이 작용하는 지구의 표면을 의식으로 보자. 무중력의 우주공간을 무의식이라 명명하자. 양력이 작용하는 대기권과 부력이 작용하는 수중을 전의식이라 부르자. 대기권과 수중은 중력과 무중력의 중간지대로, 그곳에서 우리는 힘에의 의지에 따라 뜰 수도 가라앉을 수도 있다. 즉 들랑거린다. 지금까지 무리 없이 따라왔다면, 심리학과 정신의학의 특기를 발휘해 라이언 스톤의 우주복을 벗기고 환자복을 입히자.


   라이언 스톤은 심각한 '트라우마'인 딸의 죽음을 대면하지 않으려 한다(무의식 영역에 묵혀두고 회피함). 딸이 죽을 때 운전 중이었던 자신을 원망하고(죄의식) 삶의 의지에 큰 손상을 입었다(무기력). '주지화'라는 미성숙한 방어기제를 택하며(맷의 농담과 라디오의 음악 소리를 성가셔하는 부분), 일에 과잉 몰입하는 강박 증세를 보인다(위기상황에서조차 대피하지 않고 하던 일에 매달림). 이번에는 맷의 우주복을 벗기고 흰색 가운을 입히자. 재난상황하에서 맷은 동요하지 않고 조력하는데, 그의 역할은 상담가이기 때문이다. 라이언이 맷에게 의지하려 들자, 그는 자신이 운전사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신분석학파의 상담가는 내담자에게 자꾸만 묻는다. 기억하기 싫기에 기억나지 않는 양 되어버린 그의 불안을 말이다. 그들이 하는 운전은 항상 그런 식이다.


   프로이트적 심리치료의 요체는 '의식화'이다. 현재 내가 앓는 불안과 신경증적 문제행동을 수면 아래의 몸통에 귀인 하며, 이 무의식 영역을 탐험하여 파고 위로 격상하라고 말한다. 가벼운 비유로, 자신의 잘못된 걸음걸이를 의식하지 못해 발목이 시린 환자가 있다. 그가 상담가의 도움으로 자신의 걸음걸이를 자각하는 순간 이미 병은 완치된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실제 사례에서 이 과정은 녹록지 않으며, 때로 폭풍과 같은 전이와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이 과정을 정신역동이라 부른다. 폭풍과 같은 서스펜스야말로 내러티브로서 프로이트가 인기 있는 주파수인 이유이다.


   다시 영화에 대입해보자. 라이언의 문제는 발목시림보다는 복잡하다. 그는 자신의 무의식 영역을 탐험한다. 그래서 우주왕복선의 이름은 탐험가explorer이다. 그의 임무는 다름 아닌 허블우주망원경 수리다. 허블은 무의식에 해당하는 우주영역을 관찰하는 도구이다. 알다시피 라이언의 망원경은 업데이트를 요한다. 무의식의 탐험 과정이 순탄할 리 없다. 정신역동은 쏟아지는 위성의 잔해와 어지러운 입체영상으로 표현된다. 나아가 소유주를 타고 지구로 귀환하는 과정은 무의식 탐험의 최면에서 의식으로 돌아오는 최종단계이며, 그 과정에서 통과하는 대기권과 수중은 상정하였듯이 전의식단계이다. 바다에 불시착해 뭍으로 향하는 라이언은 전의식에서 의식으로 애면글면 바르작거린 셈이다. 마침내 뭍에 닿았다. 흡사 처음 두 발로 선 유아처럼 비틀대다 뒤미처 허리를 세우고 흙을 움켜쥔다. 비로소 정신역동의 긴 여행을 마치고 굳건한 자아의 주인으로서 새로 태어났음을 뜻한다. 허블우주망원경을 수리하는 임무는 물리적으로 실패한 듯 보이지만 상징으로서 성공했다.



    중력 계산법: 타나토스의 만유인력과 에로스의 원심력


   본능은 무의식 못지않은 프로이트의 발명품이자 가설이다. 그가 상정한 죽음의 본능 타나토스Thanatos란 인간인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중력이다. 지구 위에 놓인 물체인 이상 그 심연을 동경할 수밖에 없다. 일방적으로, 모름지기, 운명처럼, 그런 법이다. 죽음 역시 그렇다. 죽음은 인간인 이상 거스를 수 없는 상습적 방향성이요 궁극적 아포리아다. 시학의 개념을 빌려오자면 평등한 순간들의 연쇄인 크로노스chronos와 닮았다. 그러나 지구 위에 놓인 모든 물체가 중력에 순응하고 납작해지진 않는다. 풀벌레는 폴짝대고 반딧불은 날갯짓한다. 죽음과의 일방적인 관계에서 바르작거리는 반작용, 그 본능의 이름은 생의 본능 에로스Eros이다. 시학적으론 의미로 충만한 시점인 카이로스kairos와 닮았다. 정리하자면, '죽음의 본능 타나토스'는 크로노스의 시간법칙에 따라 중력처럼 작용한다. '생의 본능 에로스'는 카이로스의 시간법칙에 따라 반작용한다.


   궤도에 안착한 위성은 망망한 우주 저 멀리 사라지거나 지구로 곤두박질치지 않고 일정한 상공을 유지한다. 그 비결은 중력과 원심력 간의 균형과 조화이다. 알다시피 이 균형은 깨졌다. 라이언은 중력에 포박당한 상태였다. 부초처럼, 시계추처럼, 김광석처럼. 죽음의 에너지에 의해 압살당할 위기에 놓인 신세는 우주미아와 다름없다. 목하의 라이언은 이 중력과 싸울 의지가 없다. 지구로 돌아갈 마지막 기회에서조차 과거의 실패를 곱씹으며 잠들려 한다. 그러나 완력으로, 주파수로, 환영으로, 인력으로 끌어당기는 맷의 수다스러운 설득이 잠든 정신과 의지를 흔들었다. 크로노스의 순간을 견디며 허무한 죽음으로 향하던 라이언이 카이로스를 발견하도록 안내한다. 맷이 묻는다. 어쩌다 그런 남자 같은 이름을 갖게 되었느냐고. 이 부분에서 맷은 다시 환복한다, 니체의 옷으로.



   다른 언어: 사자바위를 지칭하는 다채로운 언어


물리법 

본능에 비유 

니체의 비유 

중력의 무게 

힘의 소재 

시학에 비유 

반작용 


생의 본능

에로스 

저항하는 사자(라이언)

유희하는 아이 

디오니소스적

가벼움 

힘에의 의지

시지프(스톤) 

시점(카이로스)

영겁회귀 

 ↕

 

 

 

 

 

작용 

죽음의 본능

타나토스 

순종하는 낙타 

아폴론적

무거움 

중력의 영

제우스 

순간(크로노스) 


   어째서 니체인가. 서두에서 밝혔듯이 그래비티는 순전히 프로이트적으로만 구성되진 않았다. 서사구조는 상당 부분 프로이트적이되, 메시지는 상당 부분 니체 철학을 따른다. 라이언 스톤, 말 그대로 사자와 바위는 각기 니체와 카뮈의 소설에 등장하는 대표적 아이콘이다. 니체는 아폴론적으로 규정한 당대를 비판하며 디오니소스적 태도를 제시한다. 지나친 단순화이지만, 이성과 합리성의 호수에 본능과 유희의 조약돌을 던진 셈이라고 비유하겠다. 그는 다시 관습적이고 수동적인 정신을 중력의 영(악령)에 굴복한 낙타에 비유했다.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던 라이언이 바로 그 모델이다.


   카뮈는 그리스신화 속 인물 시지프(시시포스)를 호출해서 디오니소스적 삶의 모델로 삼는다. 우리는 그를 관습과 대결하고 제멋대로 살다가 가혹한 반복의 형벌에 갇힌 인물로 기억한다. 신들의 노여움을 사 죽음의 신(그 이름 하야 타나토스)을 맞이한 그는 오히려 사신을 속여 가둬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끌려간 시지프는 죽음을 선고받지만, 부러 제사를 지내지 않아 그마저 무색하게 만들었다. 노여움에 찬 제우스는 말소된 생존자 시지프에게 무한루프의 형벌을 가한다. 오르막에서 시지프는 중력을 견디며 바위Stone를 굴려 올린다. 정상에서 바위는 지체 없이 반대편 내리막으로 굴러떨어진다. 오르막과 내리막은 있는데 마지막이 없다. 영원히 반복한다. 독수리가 쪼아 먹은 프로메테우스의 심장은 저절로 아문다. 의지와는 관계없는 영역에 저절로 가해지는 형벌이다. 그런데 시지프는 자신의 형벌을 스스로 집행한다. 어차피 다시 내려올 줄 알면서도 바위에 체중을 싣고, 보람도 없이 굴러떨어진 바위를 좇아 터벅터벅 걷는다. 뜻밖에 카뮈는 바로 이 대목을 인간승리라고 부른다.


   낙타였던 라이언은 맷의 희생을 기점으로 놀라운 사자Lion(Ryan)의 면모를 드러냈다. 중력과의 지난한 싸움을 소화기까지 동원해 이겨나갔다. 영화를 3D나 4D로 관람한 사람들이 멀미를 느꼈을법한 고군분투의 순간들이 바로 사자의 라운드였다. 그런데 소유주의 조종석에서 그는 중력과의 싸움을 포기하려 한다. 연료는 바닥났고 주파수는 엉뚱한 곳에 맞춰진다. 라이언은 생환을 비관한다. 우연히 교신하게 된 아닌강Aningaaq이란 남자는 아기에게 자장가를 불러주고, 라이언도 그 소리에 의지한 채 잠들려 한다. 산소공급을 중단한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순간, 맷의 환영을 본다. 맷은 죽음의 한복판에서 숨겨진 위스키를 찾아 권한다. 그리고 이륙은 착륙과 같다는 결정적 힌트를 던진다. 라이언은 한 번도 이륙에 성공한 적이 없다며 조촘 댄다. 그러나 곧 하려고 한다.



   주의사항: 끌려가게 두지 마시오 Don't Let Go

   다시 시지프는 어떻게 승자가 되었던가. 제우스의 설계는 곧 그를 크로노스의 독방에 가둬두고 집약적인 허무를 체험시킴으로써, 영원히 비관하게 만들자는 야로였다. 그러나 시지프는 죽음에 반작용하고 형벌의 순간chronos을 시점kairos으로 격상시켜 영원한 삶을 얻었다. 심지어 그는 바위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의미로 충만한 시점을 창조해서 순간을 영원히 산다. 이는 곧 니체의 영겁회귀와 다름없다. 그러기 위해선 힘에의 의지가 필요하다. 라이언은 떠올렸을 것이다. 맷이 떠벌리던 털북숭이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는 미소를 지으며 우주유영 기록을 영원히 경신하겠지. 생환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아닌강의 평온한 일상. 일상의 충만한 의미. 생의 에너지. 나도 누리고 싶다. 아이의 칭얼거림. 가여운 내 딸. 나는 왜 자신을 가둬두고 순간을 견디며 살았나. 그렇지, 이륙과 착륙은 같다. 맷, 당신은 천재야. 생의 에너지가 요동친다. 다시, 라이언은 하려고 한다. 죽음의 본능에, 중력에, 시간에 자신의 정신이 끌려가게 두지 않는다.


   중력의 무게를 견디며 우직하게 사막을 걷는 낙타는 다음 단계인 사자로 진화한다. 사자는 중력의 영과 다투어 가벼워진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인 아이가 된다. 아이는 낙관하고 유희한다. 폴짝대며 순간에 의미를 불어넣어 영원하게 만드는 생의 에너지다. 영화는 니체의 층계를 그대로 밟는다. 의식의 뭍에 도착한 마지막 장면을 다시 떠올려보라. 중력의 영을 딛고 섰다. 사자는 비로소 초인(위버멘쉬)이 되었다. 그는 죄의식에 천착하지 않을 것이고, 멘트 없는 라디오 속을 유영하지 않을 것이다. 부초와 시계추를 보며 미소를 지을 줄 알고, 그리고 가끔 맷의 새로운 기록을 축하하며 위스키로 건배할 것이다.


   지금까지 프로이트와 니체를 윤척없이 들먹이며 중력이란 제목, 그리고 라이언 스톤이란 이름의 다의성을 풀이해봤다. 영화의 배경은 중력이 작용하는 정도에 따라 세 단계로 나뉘었다. 그곳에 프로이트의 동 단계 도식을 겹쳐놓아 프로이트의 삼차원 안경을 고안해봤다. 주인공의 이름에 담긴 니체의 세 단계 진화와 카뮈의 비유를 시학적으로 풀이해 영화가 말하고자하는 바를 노골화했다. 영화는 죽음에 관한 비관과 삶에 대한 허무를 허위허위 유영하는 모든 인간에게, 의미와 가치를 창조하고 아이처럼 유희하는 정신을 취하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니체의 층계에 프로이트의 주단을 깔아서 인류의 찬연한 의지를 응원한다.


   본 설명서를 통해 영화의 주파수를 찾고 중력의 라디오를 선명하게 들었다면 다행이다. 동봉된 프로이트의 삼차원 안경을 착용하면 같은 서사구조로 만들어진 <인마이슬립>과 <숨바꼭질>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 중력과 시학에 관한 예제를 찾는다면, <이프온리>를 보고 김훈의 <화장>을 읽어보라. 그리고 주인공이 택하는 '가벼원진다.'라는 문안을 지금까지 풀이한 중력에 대입해보라. 프로이트적 심리치료 내러티브가 문화에 침투한 배경이 궁금하다면, 에바 일루즈의 『감정 자본주의』를 읽어보라.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시학을 깊게 이해하려면, 김홍중의 「문화적 모더니티의 역사시학」, 『마음의 사회학』을 찾아보라.



*보너스: Aningaaq




그래비티 (2013)

Gravity 
 8.1
감독
알폰소 쿠아론
출연
산드라 블록조지 클루니에드 해리스오르토 이그나티우센폴 샤마
정보
SF, 드라마 | 미국 | 90 분 | 2013-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