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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논하다

소설/영화 은교에 관한 카프카적 분석 (리뷰)


소설/영화 은교에 관한 카프카적 분석



한 소녀가 테크의 의자에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 등나무로 엮어 만든 내 흔들의자에 소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져 있었다.[각주:1]


눈이 내리고, 그리고 또 바람이 부는가. 소나무숲 그늘이 성에가 낀 창유리를 더듬고 있다.

관능적이다.[각주:2]


  『은교』는 재작년 봄, 나에게 끊임없고 질리지 않는 화두였다. 작품을 이끄는 '이적요'와 '서지우', 그리고 '한은교'는 소설과 영화 속의 가상인물이지만, 노송이 우거진 고즈넉한 저 어딘가에 아직 살아있는 듯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들의 사연이 나는 아직도 퍽 아프다.

   처음 접한 『은교』는 소설이 아니라 각색된 영화[각주:3]였다. 당시 은교는 자극적인 논란거리 중 하나였다. 일흔을 앞둔 노시인이 고등학생을 사랑한다는 설정과 배우들의 파격적인 노출 수위가 세간의 관심거리요, 의제였다. 고대하던 영화를 보았지만, 기분만 눅눅해졌을 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대중적인 의제와 꼭 같은 수준의 감상에 그쳤고 뭔가 머리에 맴돌기만 했다. 정리가 안 된 상태가 계속됐다. 며칠 걸러 한 번씩 은교와 적요의 말소리가 들리고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수준에 벅찬 수수께끼를 만난 어린아이처럼 골똘해지곤 했다. 시간이 한 달이나 흐른 뒤에 뉴런이 기지개를 켰다. 영화를 나름대로 해석했고, 원작 소설도 읽기 시작했다.

   박범신이 고작 보름 만에 써낸 작품을 꼬박 사흘 만에 독파했다. 영화로 예습한 덕도 보았지만, 무엇보다 세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는 글의 구조[각주:4]가 가독성을 북돋았다. 포스트모던 문학의 특징 중 하나인 서사구조의 파괴와 뒤엉킴은 때로 어설픈 난해함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박범신은 혼돈 속에서도 치밀한 질서를 세우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겉만 핥는다면 글의 짜임이야 무용해진다. 명망 있는 노시인이 고등학생 소녀에게 사랑을 느끼고, 시인의 말년을 보필하던 해망쩍은 제자 서지우가 이를 시샘해서 소녀와 놀아나다가 스승으로부터 죽음을 맞는다는 이야기다. 시쳇말로 막장 중의 막장이다. 수위는 또 어떤가. 요즘 같은 때에 자칫 의심받기 쉬운 외설 중의 외설이다. '은밀한 교제'라는 표피 기저에 감추어 점철된 암호들을 풀어냄은 그래서 내 안목과 취향에 대한 변호이기도 하겠다.




   한은교의 이름은 왜 은교인가


   『은교』의 영문 제목은 'Muse'다. 시와 음악을 관장하는 그리스 신의 이름에서 꺾어온 말이다. 지금은 시적 영감 또는 그 대상을 지칭하는 쓰임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영부인 미셸 오바마를 "나에게 아주 많은 시를 가져다준 사람"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여기서 말하는 미셸의 의미야말로 버락의 'Muse'인 셈이다. 그렇다. 은교의 숨겨진 뜻 하나는 '시상(詩想)'이다. 죽어서 남긴 시인의 편지와 죽임당하고 남긴 서지우의 일기는 모두 한은교로부터 시작되었고, 그녀에게로 발송되었다. 그렇지만 'Muse'가 은교라는 이름을 대체하기에 충분한 단어일까. 이점에 관해선 더 많은 성명학적 고구(考究)가 필요하다.





   노파의 절망


   책에서 은교라는 이름이 수수께끼지만, 이적요의 필명은 자주 거론된다. 고요하고 적막하다는 뜻의 적요(寂寥)다. 시인이 고백하듯이, 이는 사실 치밀히 계산된 고도의 이미지 전략이요, 자기기만의 용례이다. 다른 작가의 소설에서도 이름 붙이기엔 저마다 이유가 있다. 김훈의 화장[각주:5]은 젊고 늙음의 대비와 갈망을 녹아냈다는 점에서 특히 『은교』와 닮았다. 작품 속 주인공은 노화의 증거로 비뇨기능 문제를 겪는 중년 남성이며, 아내는 췌장암으로 죽어간다. 그러던 중에 주인공은 같은 사무실의 젊은 사원 '추은주'를 흠모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젊음은 마치 전해 듣고 지나왔지만 가서 닿을 수는 없는 고대국가와 같이 아득하다. 추은주의 이름은 그래서 고대국가 '추鄒 은殷 주周'다. 주인공의 마음을 저급한 욕정에서 서글픈 동경으로 격상시키는 실마리가 그 이름에 함의된 것이다. 그래서 추은주라는 이름은 한은교 대신 쓰여도 무방하다. 물론 서지우·은교의 젊음과 이적요의 늙음이 대비되는 부분에 한해서다. 여기에 걸맞은 대목을 다음과 같이 꼽아본다.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각주:6]


이적요 시인이 본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란 은교로부터 나오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단지 젊음이 내쏘는 광채였던 것이다. 소녀는 '빛'이고, 시인은 늙었으니 '그림자'였다.

단지 그게 전부였다.[각주:7]




   은교라는 창에 비친 이적요의 순결신화


   즉, 은교라는 텍스트를 젊고 늙음의 생명현상에 관한 상대적 고찰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은교는 그리 간단히 대체 가능한 이름이 아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책의 뒤표지에 실린 소개말을 통해 "한 시인의 통정한 자기 부정의 드라마"이자 "부자지간의 애증"을 다룬 작품으로 『은교』를 풀이한다. 만약 가벼운 포부로 영상의 겉면만 보았더라면 이런 해석에 어리둥절해지고 동의할 수 없었을 테다. 하지만 "본성을 그대로 보전하므로 스스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각주:8] 소나무처럼 살고자 거처마저 노송이 우거진 곳으로 정한 시인의 고백을 들어보자.


지금 생각하면 너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나의 시가 가짜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

너를 만나고 비로소 나는 나를 알았다.[각주:9]


   이적요가 사랑했던 것은 은교만의 계단 오르는 소리도, 창문에 입김 뿜는 소리도 아니었다. 은교만의 옴팍 들어간 발목도, 활처럼 휠 허리선 역시 아니었다. 신성의 겉치레로 살아오다 다가오는 죽음을 발견하고서야 실재를 되찾으러 나선 늙은이 앞에, 은교는 우연히 '놓여진' 창(窓)이며, 그 묘한 시기가 공교롭게도 다른 의미의 창(槍)이 되어 자신을 찌른 것이다. 은교가 까치발을 해서 열심히 창(窓)을 닦고[각주:10], 가슴에 헤나로 창(槍)을 새긴 건 그런 의미에서다. 이적요는 은교를 '나의 처녀'라고 상습적이고 일방적으로 표현한다. 처음 이 표현을 보고서 나는 섣불리 작가의 성인지 수준을 의심했었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오해는 이미 풀려있었다. 처녀성을 덧씌운다는 것은 책의 중요한 주제의식 중 하나였다. 대중이 이적요에게 바라는 바를 이적요는 스스로 잘 알았다. 시 이외의 잡문을 한 번도 내놓지 않았고, 그 흔한 인터뷰에도 일절 응하지 않았다. 사위가 죽은 듯이 고요한 곳에서 세상과 단절한 채 적적하게 일생을 보냈다. 대중은 그렇듯 때 묻지 않은 영혼을 칭송해 마지 않았다. 교과서에도 그의 시가 수록되었고, 죽음의 날짜가 확정되기도 전에 기념관 설립 계획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주지하였듯 이것들은 모두 이적요의 치밀한 계산 하에 심어진 이미지와 환상이었다. 이런 사실을 은교를 만나고서야 호되게 깨달은 적요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의 아름다움을 본 것이 아니라 나의 욕망이 지어낸 허울을 봤을 뿐이었다.[각주:11]


   요약하자면, 적요는 대중의 은교로 살다가 은교의 대중으로 죽는다. 은교는 적요에게 분명한 처녀였으며, 적요야말로 대중에게 처녀의 표상이다. "한 시인의 통절한 자기 부정의 드라마"란 이를 두고 한 말일 터다. 이 경우에 서지우는 이적요를 향한 대중의 원형이라 할만하다.


보호해야 한 분은 은교가 아니라 선생님이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나의 선생님.[각주:12]




   은근한 교태, 은닉된 가교


   그렇다면 "부자지간의 애증"이란 또 무슨 해괴한 말인가. 이적요는 제대로 된 사랑의 추억도 가정을 이뤄본 적도 없었지만, 젊은 시절 무책임하게 만든 소생(所生)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부자지간에 '얼'이라는 이름의 피붙이는 설 자리가 없다. 첩의 소생이라는 의미를 지닌 아들 '얼'[각주:13]은 이적요의 무책임으로 편모슬하에 나도 자라며 많은 부침을 겪는다. 사람이 두려워서 산중에 기거하는 시인이 된 이적요의 마음을 연 것은 공교롭게도 공학도 출신의 시에 소질 없는 제자 서지우였다. 두 사람은 흡사 천재 모차르트와 둔재 살리에리와 같은 소질의 격차를 지닌다. 이적요는 처음에 서지우를 제자로 맞아들이지 않았지만, 착한 심성과 짙은 쌍꺼풀을 지닌 서지우의 끈기에 마음을 연다. 이적요가 서지우를 칭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라, "내 제자", "청지기", "유일한 친구"에서부터 "내 새끼", "단 하나의 가족", 심지어 "분신"으로 호명하기에 이른다. 그런 스승을 제자는 입버릇처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따른다. 아내를 바칠 수 있을 정도라고까지 마음을 형용한다. 두 남자가 모두 죽은 뒤 대학 새내기가 된 은교는 Q변호사에게 이렇게 토로할 정도다.


(…) 할아부지와 선생님, 서로가 너무 많이 사랑했다는 거예요. 절 사랑한 게 아니에요.

두 분하고 함께 있을 때마다 버림받은 기분은 제가 가져야 했다구요.

진짜로요, 끼어들 틈도 없었는걸요.[각주:14]


  곰곰이 따져보면 사실이 그렇다. 두 남자의 애증은 너무도 치열하고 빼곡해서 수시로 은교를 감시대상 삼고, 정복하려 들거나, 차라리 방해꾼으로 여겼다. 그들이 은교를 사랑했던 순간까지 부정할 순 없지만, 궁극적으로 서로를 향하는 길에 놓인 '은닉된 가교'로 이해하는 편이 옳다. 이렇듯 부자지간이나 다름없던 그들이 어쩌다 서로의 호칭을 "멍청이"와 "늙은이"로 바꿔 부르게 됐던가. 서로를 의심하고 질투하다가 종래에 자멸해버렸던가. 은교의 '은근한 교태'가 그만큼 치명적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은교는 우연히 거기에 '놓여져' 있었을 뿐이다. 컵 안의 폭풍이 거세진 것은 신형철의 말대로, "유사 이래 이어진 부자지간의 애증에 바탕"을 둔다. 아버지는 아들을 통해 자신이 못다 이룬 것을 대신 충족하려 들고, 아들은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려 하지만 양분은 제공받길 원한다는 식이다. 이적요는 늦기 전에 서지우라는 분신을 내세워 자신의 필명에 갇힌 장르문학의 욕심을 충족하려 했고, 서지우는 도움에 감사하면서도 자신만의 글을 완성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적요는 끝내 서지우가 시를 완성하도록 돕지 않는다. J출판사의 O사장은 서지우가 이적요의 서자로 취급받는다고 자극한다. 게다가 이적요가 대필해서 서지우의 이름으로 출간한 『심장』의 전말은 얼의 빚을 갚아주려는 목적으로 포장되어 있었기에, 서지우는 서자에 더한 가짜(pseudo) 서자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그런 혼란에 서지우는 이렇게 말하며 괴로워한다.


나는 누구인가. 이적요인가 서지우인가. 요즘의 내 문제는 그것이다.[각주:15]




   은교 속의 미메시스와 시뮬라시옹


   이적요와 서지우의 혼란에서 알 수 있듯이, 소설 『은교』는 내면과 외면, 진짜와 가짜, 실재와 파생실재의 갈등이 두드러진 현대철학의 관점도 녹아들어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 논쟁에서 이어진 쟝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인물들 스스로의 고민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 속의 소설인 『심장』의 내용에는 이적요의 욕망이 투영되어있다. 또, 이적요의 시집으로 소개되는 『산이 움직이고 물은 머문다』는 사실 작가 박범신의 실재하는 저서다. 뫼비우스의 띠는 소설 밖으로 행군한다. 소설에서 이적요는 서지우를 자신의 분신으로 내세우는데, 영화에서 정지우 감독은 자신의 페르소나 박해일을 통해 이적요를 거듭 모방한다.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서지우가 훔쳐서 당선되는 이적요의 글은 바로 소설 『은교』인데, 이 때문에 독자는 이적요가 곧 박범신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이런 요소들은 거울 속에 비친 내 눈동자를 바라보는 재미. 즉, 실제와 파상실재가 서로 꼬리를 문 미메시스의 묘미로써 은교를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




   은은한 교훈


   패를 가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은교』를 어떤 장르의 서가에 꽂아둘지 사뭇 기대된다. 서정시일까, 추리소설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포르노그래피가 될까. 인문학은 문·사·철로 구분되고 개중에서도 지혜를 담은 건 역사와 철학이다. 다들 역사와 철학 고전을 통해 지혜의 정수를 거둬들이는 마당에 현대 문학을 읽는 행위는 용서받지 못할 시간 낭비일까. 그렇지 않다. 용심혜두의 경지를 경험한들 감수성이 메마르면 그 지혜를 악용하기 쉽고, 행복하지 않다면 비관에만 소질을 낭비할 것이다. 소설 나부랭이 『은교』 덕분에 나는 정서가 메마르기 쉬운 시절에 지적으로 충만했다. 게다가 마지막 소원으로 손이 따뜻한 간호사를 만나 죽기를 바란 소설 속의 인물 이적요를 통해 가면으로 연명하는 삶의 말로를 보았다.

   작가는 프랑스의 철학자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시옹'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후회하지 않을 진짜 삶을 살 것을 충고하고 있다. 그리고 이적요가 자신의 깃발로 내세워온 시보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종이편지의 가치를 찬양하는 대목에서 진짜 삶의 가치는 성공보다 사랑에 있다는 외침을 나는 카프카적[각주:16]으로 읽었다. 이것이 은교의 마지막 꽃말, '은은한 교훈'이다.




은교

저자
박범신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0-04-0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10년 박범신의 신작 장편소설 [은교]'이 소설로 나는 내 ...
가격비교


은교 (2012)

Eungyo 
 7.1
감독
정지우
출연
박해일김무열김고은정만식박철현
정보
로맨스/멜로 | 한국 | 129 분 | 2012-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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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범신(2010), 『은교』, 문학동네, 21~22쪽. [본문으로]
  2. 같은 책, 13쪽. 이적요는 소나무처럼 살기를 바란다. 노송은 노인인 이적요를 뜻한다. 그늘은 그의 분신 혹은 그의 욕망이다. 은교는 '창'의 메타포를 가진다. [본문으로]
  3. 정지우(2012), 『은교 Muse』, 롯데엔터테인먼트. [본문으로]
  4. 책은 세 가지 관점(시인의 노트, 서지우의 일기, Q변호사)이 교차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으로]
  5. 올해 임권택 감독이 제작에 들어갔다. [본문으로]
  6. 같은 책, 251쪽. 영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수정된다. "너의 젊음이 노력으로 얻은 상(賞)이 아니듯이 나의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罰)이 아니다." [본문으로]
  7. 같은 책, 163쪽. [본문으로]
  8. 같은 책, 241쪽. [본문으로]
  9. 같은 책, 397~398쪽. [본문으로]
  10. 영화에서는 은교가 창을 닦을 때마다 갈등이 고조된다. [본문으로]
  11. 같은 책, 393쪽. [본문으로]
  12. 같은 책, 176쪽. [본문으로]
  13. 평민인 첩 사이에 난 자식은 서자, 천민인 첩 사이에 난 자식은 얼자라고 불렀다. [본문으로]
  14. 같은책, 217쪽. [본문으로]
  15. 같은 책, 164쪽. [본문으로]
  16.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고 억지스럽게 해석했다는 의미로 사용하였음. [본문으로]